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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밥의 역사에 대하여

by 오지이이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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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우연찮게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들어갈 직장 주변 국밥집이 너무 맛있어서 2그릇이나 과식하게 된 오늘. 문득 들던 생각이 '국밥도 역사가 있을까?'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는가 했지만 살짝 웹서핑을 해봤는데 너무 재밌는 역사가 많아서 이렇게 오늘의 포스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국밥 하면 한국인 한국인하면 밥심 아니겠는가. 국에다가 밥을 말아서 먹는 것도 한식의 한 문화이자 요리로 불리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대중적이고 대표적인 국민메뉴라고 불리는 국밥의 인지도는 나날이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이 국밥의 범위와 활용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한데, 콩나물국에 말아먹으면 콩나물국밥, 순댓국에 말아먹으면 순대국밥, 선짓국에 말아먹으면 선지국밥 이런 식으로 국과 밥이 따로나오는 따로국밥도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미디어 같은 곳에도 조선시대나 옛날시대를 다루는 창작물에서 또한 주막이나 식당 같은 곳에서 국밥을 먹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문화는 조선시대 후기에만 국한된 얘기라고 하는데 조선 전기에 있었던 주막의 개념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밥의 역사

    우리나라 국밥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조선 중기 때로 넘어가게 되는데, 문신인 윤국형(1543 - 1611)이 지은 문소만록에 따르면 전국을 다니면서 본 견문 중에 주막에 관한 얘기가 나오게 된다. 여호남에 주막이라는 것이 나오긴 했지만 오로지 술과 잘 방을 제공할 뿐 그 이외에 서비스는 없더라. 그래서 이 많은 여행자들이 개인의 짐을 비롯해서 먹거리까지 가지고 다닐 수밖에 없다고 나와있다. 하지만 이 당시가 임진왜란 시기이다 보니 물자가 부족했던 사정이 다소 있어 보이긴 하나 실제로 다른 문헌들에서 찾아보았지만, 이렇게 민가에 여분의 대가를 치러야만 음식을 제공해 주는 방식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주모가 식자재를 직접 관리해서 음식이나 메뉴가 있는 형태가 아니라 여행자들이 음식재료를 가지고 부탁을 하면 요리를 해주는 게 특이한 부분이었다. 이 또한 그럴 수밖에 없던 부분으로 조선 후기가 되어서도 한양을 비롯한 다른 주요 대도시를 제외하고서는 지방에서는 화폐를 사용하는 일이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지방에서의 화폐의 역할을 했던 물품들은 쌀과 무명 등이었고, 돈을 내고 값을 치러야 지 밥을 사 먹는 행위가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본다. 이렇게 밥을 해서 먹으려면 최소한으로 쌀이나 보리, 조 같은 곡식을 스스로 준비해 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상공업이 조금씩 발달하기 시작했던 조선 후기로 가보면 드디어 화폐가 지방 사회에서도 자리를 지키게 되면서 마을 사이사이마다 주막이 생기면서 음식을 제공하는 것 또한 가능한 문화가 생겨났다. 이렇게 국밥집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조선후기부터는 외식이라는 문화가 생겨나면서 상공업에 발맞춰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양에서는 수많은 장국밥집들이 생겨나게 됐는데 이 장국밥집들 중에서 유명했던 곳이 19세기에 조선 현종조차 변복하고 애용했다는 설이 있는 무교탕반이라는 곳이다. 뼛속까지 신분사회에 빠져있었던 조선시대에 신분차이에 상관없이 인기가 매우 좋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장국밥이 주 메뉴였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야 국밥이 다양해지고 종류가 많아지다 보니 골라먹는 재미까지 생겨났지만, 그 시대는 주로 장국밥이 국밥종류에 한하였다고 한다. 간장이나 된장등 장을 사용해서 국물의 간을 걸쭉하게 맞춰서 이름이 장국밥이라고 하는데, 흔하게 유행했었던 다른 지방들의 국밥이 시래기나 우거지 등을 가지고 끓인 채소 국밥이었다면 이 장국밥은 고기를 많이 넣어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오랜 시간 동안 명성을 유지하여 작고한 월탄 박종화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양지머리만 가지고 국밥을 만들어도 충분한데 젖통 부위 고기를 넣고 갖가지 고명으로 양념한 산적까지 넣어주니 고기와 산적이 어우러져 천하진미가 따로 없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르면서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노동자 신분이 먹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설렁탕이 특유의 고소한 냄새와 푸짐한 양 등을 강점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인기를 얻게 되면서 장국밥은 서서히 자연스럽게 잊히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나라 해방 이후에 물자가 여러 방면으로 풍족해지게 되자 경상도에서 유명했었던 돼지국밥, 전주에서 알아주던 콩나물 국밥등도 여러 사람들을 통해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이렇게 하나 둘 각양각색의 특징이 있는 국밥들이 생겨나면서 현대시대까지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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